리뷰 대상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법률 상 “미친존재”는 정신질환자 혹은 정신장애인으로 정의된다. 정신건강복지법과 장애인복지법에서 각각 정신질환과 정신장애가 혼용(강상경, 2022)되기 때문이다. 장애학에서는 질환과 장애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장애를 의료화하고 질환으로 치부하는 것은 “무능함”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근대적 장애 운동 진영에서는 장애인이 평가절하당하는 것을 우려하며 장애와 질환의 동일시를 경계해왔다(Wendell, 2001; Oliver, 1990; Morris, 1991; Amundson, 1992에서 재인용). 웬델(2001)은 이러한 입장이 “정말로 아프고 병들고 건강이 안 좋은” 장애인의 존재를 간과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웬델은 사회구성주의와 장애 행동주의의 전략이 ‘손상’을 간과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웬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만성적 손상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며, “손상의 현상학”에 초점을 맞출 것을 주장한다.
“나는 미쳤습니다”란 말은 “다른 삶을 살게 해줘!”라고 발버둥치는 표현이다. 미쳤다고 말할 때 더 이상 질병인지, 장애인지, 질병과 장애 그 사이 무엇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미쳤다는 것은 모호하다. 미쳤다는 것을 이거라고 정의하는 순간 삶이 사라진다. “우리는 미쳤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이성적인 언어로 설득하지 않을 것이다. 미친존재는 미친존재다. 각자 자기 삶이 있고 자기 정의는 언제나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싶다. 잘 살고 싶은 것뿐이다. (p.19)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미쳤다는 것에 장애의 사회적 모델을, 이성 중심의 서양철학을 따른 인정 이론을, 만성질환과 질병권 논의를 적용할 수 있을까? 웬델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사회적 모델의 한계를 지적하며, 장애와 질병, 질병과 건강, 건강과 장애 사이의 경계를 흐리기 위한 주장을 펼쳤다. 더불어,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 사회 환경의 개선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개인이 갖는 고통과 일차적 손상을 간과한다는 점을 비판해왔다. 인정 이론은 비/이성을 창조하고 미쳤다는 것을 삶의 바깥으로 내모는 서양 철학에 종속되어 있다. 오드리 로드의 말처럼, 아버지의 연장으로는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 없다. 미친사람이 합리적 정체성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인정 정치를 통해 깨부수고자하는 이성중심적 세계관이 더욱 공고해질 뿐이다. 만성질환과 질병권의 논의는 어떠한가? 질환과 질병을 이야기하다보면 화학적 약물 치료로서의 돌봄(care)이 두드러진다. 미친존재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지고, 증상과 약물 처방만이 남는다.
따라서 성연은 “미쳤다는 것을 이거라고 정의하는 순간”(p.19) 삶이 사라진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미쳤다는 것은 그냥 미쳤다는 것이다. 미쳤다는 것이 장애인지 질병인지 정체성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미친존재가 그냥 미친존재가 되면 삶과 자기정의가 남는다. 성연은 미친존재라는 표현으로 “아픈 몸과 장애의 경계(p. 53)”를 무너뜨린다. “미친존재는 권력을 가진 존재에게 ‘위협적인 존재’”(p.53)가 된다.
연극하기: 미친 시공간에서 돌봄을 행하기
성연은 연극을 통해 미친존재로서 다른 삶을 살아간다. 성연에게 연극은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벗어나, 내가 왜 여기 있는지 고민”(p.6)할 수 있는 공간을 창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쳤다는 것은 시간이 휘어지는 일이다. “사회적 시간과 미친 시간 사이에 시차가 생긴다.”(p.46). 미친 존재의 시간은 비선형적으로 흘러간다. 각성하거나 과몰입한 상태가 되면 시간이 순식간에 녹아버린다. 끝없는 슬픔과 충동이 찾아오면 시간이 도저히 가지 않아 괴로워한다. 미쳤다는 것은 공간이 왜곡되는 일이다. 사회적 공간과 미친 공간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 미친 존재의 공간은 종잡을 수 없다. 공황이 오면 땅이 꺼진다. 신이 나면 아주 먼거리를 단숨에 이동할 수 있다. 슬픔과 무기력함이 찾아오면 침대 바깥은 무시무시한 공간이 된다. 미친 시공간에서는 돌봄도 미쳐야madden한다. 성연은 연극을 통해 돌봄을 광기화maddening한다.
그러나 “연극은 사라지는 일”(p.12)이다. 때문에 미친 시공간은 연극이 끝나면 함께 사라진다. 그럼에도 미친존재감은 끝없이 연극을 통해 미친 돌봄을 한다. 실수를 하고 서로를 상처입히다가도 기다리는 사람의 책임을 생각한다. 시공간은 사라졌지만 시공간에 함께 머물렀던 사람이, 사람과 함께 지어낸 기억이 남는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졌던 미친 공간이 돌”(p.52)아온다. 미친존재감은 “진짜 세상이 미”(p.52)칠 때까지 연극을 한다.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미친존재감의 미친돌봄을 통과해 온 이상, 이 질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삶을 이성과 철학과 학문의 언어로 가둘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종잡을 수 없는 미친 시공간 속에서, 미친존재감은 기어이 서로를 돌보는 방법을 발명해낸다. 성연의 글은 규정되지 않은 채로도, 미친 채로도, 약을 먹거나 먹지 않은 채로도, 미친존재로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극은 사라지지만 삶은 계속된다. 미친 존재가 그냥 미친 존재로 살아숨쉴 수 있을 때까지, 미친존재감의 연극은 계속될 것이다.